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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nd집:미국/미국방랑기

안녕? 하와이 (feat. 호놀룰루의 친구집 방문)

by 예지 Ambitious 2020. 9. 10.

때는 시간을 거슬러 2018년 가을, 그 당시 우리는 한국으로의 완전한 역이민을 위해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시댁에 잠시 머무르고 있는 상황이었다. 3개월 유럽으로의 장기간 여행을 끝내고 돌아온 터라 여행의 여운이 남아 있기도 했고, 자유로운 생활에서 제한된(?) 생활로 돌아와서 한껏 마음이 갑갑해져 있기도 했을 때였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한 교외 지역에 사시는 시부모님 댁은, 좋게 말하면 자연친화적이고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도시와는 조금 떨어져 있는 시골 느낌의 집이었다. 인터넷에 사진 한 장 업로드할 때면 오 분씩 기다려야 하고, 외식 한번 하려면 마음먹고 차 타고 나가야 하는. 대도시 중에서도 대도시 출신인 나에게는 시골 체험이나 다름없는 곳.

 

남편처럼 바쁘기라도 하면 괜찮았으련만, 나는 한국행이 결정됨과 동시에 일도 때려쳐버렸고, 너무 느린 속도 탓에 시댁 인터넷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하루 이틀은 피아노도 치고 노래도(;;) 하고, 뒷동산 앞동산에 산책도 가고, 책도 읽고, 유튜브 영상 편집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지만, 그것도 말 그대로 하루 이틀이지. 이런지도 벌써 한 달 가까이 된 상황이었다.

 

시어머니는 하루 종일 청소와 퀼팅 또는 독서를 하시고 시아버지는 하루 종일 무언가를 뚝딱뚝딱 만드시거나 잔디를 깎거나 하는 이 일상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 자신은 너무 잉여인간 같았다. 그곳의 한 없는 평화로움이 감사하면서도 그 평화로움에 질식되어 숨을 쉬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때쯤, 대학원 친구 테라로부터 연락이 왔다.

 

좋은 공기과 뒤뜰 야외 스파에 더 이상 감동하지 못할 정도로 시골 생활에 질려버린 나는 어쩌면 이미 그곳을 벗어날 핑계를 찾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예지, 보고 싶다"라는 말에 "그럼 보러 갈까?"라는 말이 바로 나와버린 걸 보면.

 

그렇게 바로 비행기를 타고 하와이로 갔다.

 

물론 남편 두고 나 혼자.

 

 

 

하와이에 들어가면서 작성해야 하는 농/축산물 반입 신고서

 

호놀룰루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처음 나를 맞이한 건 한국을 떠올리게 하는 덥고 습한 공기였다. 이상하게도 하와이에 대한 로망이 없어서 바로 바다 건너편- 심지어 같은 나라 -에 살면서도 한 번을 궁금해하지 않았는데, 실제로 와 본 하와이는 마치 계속 그리워하던 곳에 돌아온 것과 같은 아련한 느낌을 갖게 했다. 그리고 공항으로 마중 나온 테라와 테라 남편 브루스가 마치 집 나간 동생을 다시 만난 듯 나를 맞이해 줘서, 꼭 친정집에 온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테라와 브루스의 하와이 보금자리는 딱 그들같은 느낌의 깔끔하고 정갈한 집이었다.

"집처럼 편하게 지내"라는 말에, '이것보다 한 열 배는 정신없어야 내 집처럼 느껴질 것 같은데'라는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도, 집의 여기저기를 둘러보기 바빴을 만큼 예쁜 구석이 많은 장소. 특히나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실내에서 창문을 통해 보이는 밖의 풍경들. 파릇파릇하고 촉촉한 하와이의 느낌을 그대로 담은, 밝은 색채를 잔뜩 사용해서 그린 유화 같았다.

 

당시 일 때문에 바빴던 둘 덕분에 나 홀로 그들의 집에서 시간을 보낸 시간이 꽤 됐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어도 뭔가 하는 느낌이 들게 하는 - 시댁과는 정반대의 - 이상한 기운이 있는 장소였다. 더불어 캘리포니아의 건조한 기후에 고문당하던 내 피부도 다시 수분을 먹어 탱탱해지는 느낌이었고.

 

남편도 홀로 남겨두고 도망치듯이 온 여행이긴 했지만, 이렇게 좋은 곳에 있자니 계속 남편 생각이 났다. 같이 왔으면 더 좋았을 걸. 맛있는 걸 먹으면서도 계속 생각났다. 같이 먹을 수 있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끊임없이 사진을 찍어서 남편에게 보냈다.

 

하지만 그런 아쉬움- 또는 보고픔-도 테라와 둘만의 시간을 보내면서 점차 사라졌다. 워낙 오랜만에 만나기도 했고, 친구와 마음껏 수다를 떨 수 있는 환경을 오랜만에 맞이하다 보니, 묵언수행 도중 갑자기 대화가 허락된 수도승이 된 기분이었기 때문에. 이 기회를 허무하게 날려 보낼 수는 없었다.

 

 

 

 

하와이 호놀룰루의 노스쇼어

 

하와이로 이사 온지도 꽤 됐는데 아직도 제대로 마실만한 원두를 못 찾았다는 테라의 말에, 노스쇼어로 원두 찾기 대장정에 나섰다. 세계 3대 커피라는 말이 무색하게 코나는 우리 둘의 입맛을 사로잡지 못했는데, 코나의 원산지인 만큼 코나가 아닌 커피를 맛있게 볶는 집을 찾기가 힘들었다. 물론 코나 커피라고 표기되어 있어도 코나 100%가 아닌 10~20%만 들어있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오늘의 미션은 코나가 섞이지 않은 원두 중에 맛있는 원두를 찾는 미션. 

 

노스 쇼어에 있는 로스터리의 모습들

노스 쇼어는 호놀룰루에서도 나름 힙한 동네인 만큼 로스터리도 많고 카페도 많았는데, 대부분이 관광객 상대의 커머셜 느낌인 데다 커피도 - 우리 기준에는 - 특별히 맛있는 곳을 찾기는 힘들었다. 아니 아무리 코나가 인기 있어도 이렇게까지 코나만 팔일이야? 😡

그렇게 헤매고 헤매던 도중, 우연히 커피 갤러리라는 곳을 들어가게 됐는데, 웬걸 커피가 진짜 맛있는 거다. 거기다 가격도 혜자!

 

친절한 종업원 분 덕분에 원두에 대한 설명도 듣고, 원 없이 커피를 마셨다. 여기서 돈 주고 사마신 커피가 다른 곳에서 무료 시음한 커피보다 백배는 만족스러웠다. 원두 구매 후, 맛있는 커피를 들고 카페 앞에 앉아서 끝없이 수다를 떨었다. 남편 이야기, 인생 이야기, 친구들 이야기.

 

우리가 앉은 테이블 밑에서 끊임없이 돌아다니던 병아리들. 하와이엔 병아리가 정말 많다.

 

오아후 섬의 북쪽에 자리 잡은 노스쇼어는 하와이 로컬들이 좋아하는 서핑 타운인데, 처음에는 심한 우범지대였다고 한다. 지금도 치안이 좋지는 않아 조심해야 하는데, 그걸 잘 모르는 여행객들이 강도를 당하거나 트렁크 내의 물건을 절도당하는 일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곳이다. 그래도 아기자기 예쁜 가게가 많은 만큼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 곳.

 

더 구경하고 갈까? 하는 테라의 말에 그냥 간단히 shave ice(쉐이브 아이스)나 하나 먹고 돌아가자고 대답했다. 쉐이브 아이스는 우리의 빙수처럼 갈아낸 얼음에 온갖 향을 입힌 시럽을 뿌린 디저트인데, 미국 본토 지역에서도 인기 있는 여름 간식이다. 쉐이브 아이스를 찾을 때마다 남편은 시럽 맛으로 가득 찬 이런 설탕 덩어리를 뭐하러 먹냐고 구박하지만, 막상 시켜 놓으면 본인이 다 뺏어먹기 일쑤였다. 그만큼 중독성이 있는 마성의 맛이랄까.

 

우리가 고른 곳은 마츠모토 쉐이브 아이스라는 인기 있는 가게였는데, 역시 명성이 무색하지 않게 줄이 엄청 길었다. 기다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언제 또 여기까지 와 보겠어 하는 마음에 기다려 보기로 했다. 하지만 그 맛은.... 그냥 우리 동네 트럭에서 파는 거랑 별 다를 게 없는데?

 

실망한 우리를 위로하고 싶었는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하늘이 쌍 무지개를 보내줬다. 고마워!

 

쌍무지개인데, 아쉽게도 사진에서 위쪽의 무지개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잘 보면 보임!

 

일 마치고 돌아온 브루스와 셋이 머리를 맞대고 저녁 메뉴를 고민했다. 하와이스러운 식사를 고민하는 둘에게 '너네가 먹고 싶었던 거 먹자'고 제안했다. 나는 하와이에 놀러 온 게 아니라 너희를 보러 온 거니까. 한참을 고민하던 그들은 평소에 가고 싶었던 시추안 (사천) 스타일의 가게를 골랐다. 랜덤으로 결정한 식당이었지만 그 날을 마무리하기엔 최고의 식당이었다. 

 

냄새가 너무 심해서 과연 먹을 수 있을지 고민했던 사천 곱창 국수는 맛 만큼은 내가 먹어 본 국수 중 최고였고, 그날 우리의  분위기 또한 역시 최고였다. 한참을 수다 떨던 우리는 흥겨움을 이기지 못하고 자리를 옮겨서 한잔 더  해야 했다. 

 

하루를 마무리하기 딱 좋았던 하와이 수제 맥주 =)

 

인생은 지나 봐야 아는 거라지만, 이 여행이 나에게 말해 주는 사실은 무엇보다 명확했다. 이런 친구를 만난 것만으로도 너의 석사 생활은 성공한 거나 다름없다고. 새삼스레 우리의 우정에 감사했다.

 

집으로 돌아가기 아쉬운 저녁이었지만, 우리는 다음 날을 기약하면서 집으로 향해야 했다. 내일은 아침 일찍부터 집을 나서야 했기에.

 

하와이에서 내 최애였던 Red-crested cardinal (홍관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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